Tenet ★★★

x에 관한 등식을 y에 관한 것으로 역산해도 모순이 없듯, 열역학 등의 수식화가 가능한 세계에선 시간의 순행과 역행이 모순없이 동시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에 바탕했다. 모순없는 체계 구현에 들인 노력에 비해, 따라서 기확정된 미래를 맞는 감정의 문제가 경시됐다.

(이하 '장문 평' 입니다. 22일 유료 시사회에서 한번 보고 작성한 글이라 잘못 기억한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 생각에 이 영화는 안 좋은 의미에서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키는 작품이었습니다. 비단 이 영화가 내비치는 미래나 운명 등에 관한 철학이 빈곤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단순히 연출의 차원에서도 작품이 내세우는 그 이론상 모순없는 세계관의 구현을 위해 인물 감정 등 인간적인 면의 연출이 너무 경시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부에서 이공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일단 이 영화가 전제하는 세계관은 대략 하술하는 바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 학문 분과상 오류가 있는 생각이나 표현이 있을텐데 미리 양해바랍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열역학 법칙에 따르면, 이 세계의 모든 반응은 엔트로피(entropy)를 증가시킨다는 한쪽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따라서 실제로 시간을 역행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자연계의 순행, 그러니까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원래 움직여지게 될 것을 엔트로피와 무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처럼 실제로 엔트로피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물체를 만든다는 것은 마치 무한동력 기계를 만든다는 것과 같기에 구현이 불가합니다. 그 이유를 가리켜 설령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우리가 특정 물건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할 지라도, 그렇게 물체를 움직이게끔 하는 그 과정 자체에 의해 발생하는 엔트로피가 있기에 계(system) 안의 엔트로피 총량은 더 증가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다만 감독이 이 영화에 구현한 세계관에선 열역학과 무관하게 시간 역행이 가능한 기술이 미래에 등장합니다. 영화는 그 기술 자체의 실체를 밝히진 않지만, 초반에 주인공과 과학자의 대화를 통해 대략적인 이론상 근거를 밝힙니다. 예컨대 컵에 물을 따르는 영상을 녹화하여 그것을 역재생할 수 있다는 것은 표면상으론 자연 현상에 역행하는 모습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건 마치 열역학 등 뉴튼 물리학 (Newtonian physics)의 공식들처럼 자연계의 어떤 현상을 'y=ax+b' 같은 수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면, 같은 수식을 'x=(y-b) /a'로 정리해도 그 수식의 변환 과정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한 모순없이 이뤄진 점을 현실과 달리 액면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앞선 수식에서 x가 대입값이고 y가 결과값이지만 그 값의 의미를 그 수식상 서로 바꿀 수 있다면, 마치 처음엔 원인과 결과였을 두 변수의 관계를 역전시킨 점에서 시간 순서에 기초한 인과관계의 역전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미적분 등의 방법으로 단순히 수식상으론 예컨대 x와 y 간에 그 공식의 역산이 이뤄져도 모순없이 성립하는 것처럼, 이론상으로는 수식화가 가능한 열역학 등의 법칙들이 존재하는 하나의 같은 계(system) 안에선 순행하는 물체와 역행하는 물체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게 이 영화의 전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변수 사이의 매개점만 유지된다면 등식을 어떤 특정한 변수에 관하여 새로 다시 정리하더라도 상관없듯, 시간의 서로 상이한 두 흐름도 동일한 세계의 어느 특정 시점에서든 동시에 대칭하여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영화도 '인버젼(Inversion)'에 관한 여러 설정을 통해 이러한 시간의 대칭성(symmetry)을 몹시 강조합니다.

또한 물리학 수식의 그런 역산 개념 자체엔 문제 풀이자의 감정이 당연히 배제되어 있듯이, 이 하나의 영화로 갇힌 세계관은 여러 평행 우주들 중 하나의 우주 그 자체로서 내부 모순이 없기에 모든 인물의 생사 시기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설명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 영화엔 각 인물이 인버젼 회전문 장치에서 대칭을 이룬 채 한쪽으로 들어갔다 반대쪽으로 나와야 한다는 설정이 있는데요. 이는 마치 수개의 점을 잇는 한붓그리기(Eulerian trail)가 가능하려면 그 연속선이 시작점과 종점을 제외한 나머지 각 하나의 점(node)을 들어갔다 나오는 총 횟수가 쌍(짝수, even number)을 이뤄야 한다는 이산수학의 논리 ("오일러의 그래프 이론, Euler's Graph theory")의 적용 국면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물들이 아무리 몇번씩 과거로 역행한다고 해도, 이들은 마치 특정 시점의 인버젼 장치 사용을 각 점으로 삼아 자신들의 인생줄을 한붓그리기로 잇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죠. 그리고 그렇게 여러 명의 동일 인물끼리 서로 물리적으로 접촉하면 안 된다고 설정이 붙은건, 그 한붓그리기가 가능해야 할 혹은 가능하다는 것에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고요. 따라서 주인공 앞에서 역으로 보여지는 닐(Neil)의 죽음이나 캣(Kat)의 총에 맞은 악역 사토르(Sator)의 죽음은 그런 한붓 그리기로 이어지던 인생줄의 종점이란 점에선, 그 순간이 그들 인생의 진짜 끝이라는걸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과거로 가는 그 행위는 현재의 특정한 점(point)에서 과거의 어느 한 점(point)으로 바로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같은 시점에서 열역학 법칙에 따른 시간 방향을 기준으로 물체가 미래로 순행 혹은 과거로 역행하는 선(trail)을 마치 U턴을 하듯 새로 그리며 이동하는 개념인 것이죠 ("Not a time travel!"). 따라서 설령 특정한 시점에 동일 인물이 여럿 존재하고 동일 시점에서 그들 각자의 생사가 달라져도, 그 인물 삶의 한붓그리기가 성립 가능하다면 평행우주 중 하나인 그 세계 자체의 내부적인 모순은 없다는 설정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직접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버젼'된 다른 물체와 작용하는 것도, 이는 단순히 앞서 그려진 그 한붓그리기 선 위에서 그 물체에 한하여 결과적으로만 그 사람의 기준에서 과거를 향해 마치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 영화 안의 그 단일한 세계에선 각 인물마다의 인생이 이미 한붓그리기로 그려져 있는 것이고, 다만 그 선의 종점에 다다르지 못한 채로 그 선을 양방향으로 그리는 각 인물은 자신의 종점이 어디일지를 아직 그 시점에서 예측하지 못할 뿐이죠. 여기까지 생각하면 평행우주들 중 하나로 고정된 이 영화의 세계관에서 각 인물의 삶은 사실 시간의 방향을 오고 가는 하나의 '점선(dotted-line)'처럼 확정되어 있단 결론을 도출할 수 있죠. 그렇다면 그 인물은 종점에 이르기 전엔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방향을 결정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론 이미 방향이 정해진 그 점선 위를 '실선(solid-line)'으로 채우는 것에 불과하겠죠.

게다가 오히려 특정 인물이 인버젼을 한 다른 인물 등을 통해 자기 선의 종점을 알게 되면 역설이 생겨서 어떤 물리적인 결과가 초래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영화가 마지막까지 계속 '무지(無知, ignorance)'를 다행스러운 것이라 말하고, 이에 관한 대표적인 장면으로 주인공이 구출된 이후 파란 패치를 단 닐(Neil)에게 그의 최후를 알면서도 망설이다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죠. 어차피 닐(Neil)은 그 시점에서 주인공과 헤어지고 '인버젼'을 거친 이후, 어느 시점에선 자신이 철문을 따주고 총알을 맞지 않으면 주인공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모순 발생을 막기 위해 희생할 것임이 이미 그 특정 평행우주에선 정해져 있으니까요. 영화가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났다고 ("What happened has already happened") 수없이 강조하는 건, 사실상 한편으로는 모순 발생을 막기 위해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나야만 한다는 필연처럼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이미 일어난 것인데 영화 속의 인물들이 어떤 선택이나 행동을 하는 동기가 무엇인지 의문이 남을 수 있습니다. 영화 중에도 함께 시간 역행 중인 주인공이 닐(Neil)에게 자신들이 살아있다는건 알고리즘을 탈취 성공한게 맞지 않냐는 질문을 하죠. 닐(Neil)은 긍정적으로 보면 그렇겠지만 평행우주를 언급하며 역설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 답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역설이 발생했다면 그 평행 우주의 존부 자체를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시간에 역행하여 임무를 성공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임무에 성공해서 역설이 발생하지 않았기에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임무에 실패하여 역설이 발생하면 그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역설로 인해 자신들이 존재하는 그 특정한 평행우주의 존재가 소멸했다면, 애초에 열역학 법칙을 기준으로 방향이 정해진 시간 기준선을 포함해 모두 소멸한 것이니 이들이 미래 기준에서 역행하고 있다고 해서 임무에 성공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으니까요.

이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세계관에선 특정 시점에서 '맨 처음 순방향으로 움직여 그 시간을 거친 A'가 '이후 인버젼 장치를 거쳐서 결국 같은 시간을 다시 거치는 셈인 A+'에 관한 '과학적 진실(scientific truth)'을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역설을 발생시킵니다. 왜냐하면 회전문에 들어가는 A로서 반대편 출구를 나오는 A+를 보는 특별한 경우를 빼면, 통상 A가 그 시간을 통과한 때에는 자신이 이후 A+로서 수행할 일을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으니 모르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A로서 A+의 과학적 진실을 미리 아는 것 자체가 어떤 정보를 발생시킨 행위란 점에선 물리적인 행위만큼이나 모순이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주인공이 테넷을 만든다거나 닐(Neil)을 영입한다는 건 엄밀히 말해 과학적 진실이 아닌데, 예컨대 내가 어느 시간에 어느 위치에서 무슨 움직임을 하고 있느냐는 과학적인 진실입니다. 그래서 작전이 끝나고 주인공이 닐(Neil)의 죽음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을 숨기고, 닐(Neil)은 주인공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도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죠. 반면에 프리포트의 주인공이나 베트남의 캣(Kat)이 앞서 말한 A로서 A+인 자신의 다른 개체를 동일 시간에 만나긴 했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 평행우주에 역설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고요. 만약 A로서 A+인 자신의 그 과학적 진실을 알게 되어 역설이 발생한 우주였다면,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거나 그 시점부터 존재하지 않는 우주가 되겠죠.

이처럼 이론상 모순없는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해, 이 작품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연출이 유난히 잦습니다. 예컨대 어떤 두 인물이 대화를 하며 한마디 할 때마다 플래시백 컷을 삽입하는 등 편집 컷이 많은데요.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연출 처리를 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는 앞서 적은대로 이 영화 자체의 갇힌 세계관 안에서 모순점을 최대한 제거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나중에서야 그 의미가 밝혀질 일종의 떡밥을 사전에 많이 깔아둠으로써, 애초부터 인물 사이의 자연스러운 흐름보다 영화 세계관의 모순없는 논리 구축에 더 신경을 쓴 것이죠. 이런 식의 연출 처리가 워낙 반복되니 나중에 가면 이게 나중에 떡밥이었다는게 드러나겠구나 예측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엔드 크레딧(end credit)이후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thers)' 파란 로고를 보면, 영화 시작할 때의 빨간 로고조차 일종의 떡밥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거꾸로 돌려봐도 정상적으로 재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영화가 모순없이 읽힐 수 있도록, 순수하게 이론적인 서사 뿐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회문(palindrome)'으로 만든 티를 낸 것이죠.

그런데 영화의 이러한 연출 결정은 관객이 서사 흐름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론 인물의 감정에 공감하기 어렵게 합니다. 예컨대 이 영화의 결말부에서 주인공과 닐(Neil)이 헤어지며 짓는 표정 등을 이해하려면, 관객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처음 보면서도 이해하고 그 복기도 편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화의 서사가 단순히 많이 왔다리 갔다리 할 뿐, 인물의 감정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편하게 따라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연출 노력은 앞서 적은 이유로 인해 부실합니다. 그러하다 보니 보편적인 관객의 입장에선 이 영화가 뭔가 많이 보여준다는건 알겠는데, 그게 정말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한다든지 아니면 즉각 공감하기가 곤란해집니다. 예컨대 악역이 시간 모순의 역설을 발생시켜 인류의 존재를 지우려고 하는 이유를 보면, 거칠게 달리 말해 "널 가질 수 없으면 아무도 널 가질 수 없어"에서 발전이 없는데 거기에 감정을 이입해서 악역에도 공감을 하긴 어렵죠.

결국 이 영화는 종전까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에 담겨온 그의 보수적인 세계관 및 영화관의 한계를 좀 더 명쾌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내부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가 논리적인 '회문'이 되기 위해, 각 작중 인물과 같은 개인에게 일종의 장기말(chess-piece) 이상의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점 말이죠. 마치 이 감독에게 당신 개인의 감정과 이 세계의 대의 중에 선택을 하라고 하면, 이 사람은 너무 쉽게 후자를 선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자신의 원칙만을 굳게 믿고 빠르게 각 상황을 밀어붙이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개인보다 대의를 선택하는게 국가 정부의 법이나 정책 같은 경우에선 결론적으로 합당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희생될 수 밖에 없는 개인들의 감정이 과연 그런 기계적인 목적만으로 쉽고 당연하게 고려될 수 있는지는 다른 차원에서 의심을 해볼만 하죠. 법률 조문의 구성처럼 모든 일에 원칙이 있다면 그에 대한 예외가 함께 존재하도록 사람이 사고하는 건, 한편으론 그 원칙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예외를 인정하게 되는 이유에도 사람의 감정이 움직이기 때문이니까요.

물론 이 영화 역시도 개인의 희생과 세계의 대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딜레마를 짧막하게 건드리긴 합니다. 예컨대 악역의 말에 따르면 인류의 미래는 지구 온난화 등으로 물이 말라버리는 위기에 놓이게 된다고 하죠. 그래서 '할아버지의 역설(grandfather paradox)'이 정확히는 물리적으로 어떤 결과를 발생시킬지 모르기 때문에, 어차피 망한 미래 인류의 입장에선 인류 절멸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위험이 있더라도 이를 감수할만 했다는 뉘앙스를 남깁니다. 따라서 이 문제 자체를 생각해보면 미래 인류의 입장에선 상당히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로 받아들여졌으리라 싶은데, 영화가 이를 단순히 악역의 여자 문제와 엮어서 "가질 수 없으면 부셔버리겠어"로 퉁치는건 너무 감정의 문제를 다루는데 소홀하다거나 혹은 관심이 없는게 아닌가 싶죠. 설령 주인공이 원칙론자로서 미래에 자신이 어떤 일을 하겠다는 약속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도, 정말로 미래에 어떤 결과가 발생하든 현재의 기준에서 소신을 지키는게 과연 더 중요하다 할 수 있을까 의문도 들고요. 더 나아가 이론상 모순없는 이 영화의 세계관이 설령 모든 사람들의 미래가 기확정된 운명론적인(fatalistic) 세계관이라도, 그걸 맞이하는 각 인물의 자기 인생에 따른 감정의 문제가 그렇게 연출상 경시될 만한지 모르겠어요. 인물이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조차 이 특정 평행우주에선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이라 할 지라도, 어차피 그 세계관을 바라보는 제3자인 관객에겐 그 기확정된 감정선(pre-determined trail of emotion) 자체를 바라보는게 전혀 무의미하진 않겠죠.

게다가 이 영화가 자랑하는 그 단단한 논리를 관객 입장에서 그대로 다시 영화에게 반문하면, 미래는 어차피 알 수 없는 것이니 일단 현재에 충실하자는 영화 주제도 허약해집니다. 영화의 결정론적(deterministic) 세계관에선 인물이 아무리 지금 자신의 자유 의지를 힘껏 발휘하더라도, 고민을 몇번씩 거치든 간에 의지를 가지게 되는 것조차 그 특정 평행우주에선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 실제 의미가 없습니다. 영화는 역설이 발생시키는 물리적 결과를 알 수 없으니 오늘에 충실해 봐야 한다는데, 사실 그 특정된 평행우주에선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는 시간선을 바라보는 제3자(third-person)의 입장에서 보면 그 역설의 발생 시점을 특정할 수 있으니까요. 인물이 자기가 속한 특정 우주에서 역설이 발생할 지의 여부 및 그 시점을 스스로 관측할 수 없다고 해서, 적어도 영화의 서사처럼 인물을 기준으로는 선·후행 구분이 가능하다면 역설의 발생 시기가 객관적으로 특정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 어렵죠. 만약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지금 충실히 살아야지란 생각을 하게 되든, 아니면 어차피 미래가 다 결정되어 있다면 내 마음이 가는대로 살겠다고 하든 실질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영화의 논리를 정말 엄격히 되돌려 주자면, 그런 생각들 모두가 우리가 기거하는 그 특정 우주 안에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나의 자유 의지는 실상 없으니까요.

표면상 무모순을 자랑하는 세계관을 직조하여, 영화가 그런 'Carpe diem' 같은 인간적인(humanistic) 교훈을 이끌어낸다는 것 자체도 논리적인 하자에서 자유롭지 못해 보입니다. 수학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Godel's Uncertainty Theorem)'에 따르면, '어떤 체계에 모순이 없다면, 그 체계에는 참이면서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라고 합니다. 이 영화 또한 하나의 무모순인 체계라고 한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역설의 개념이 참이면서도 증명할 수 없는 명제란 점에서 이 '불완전성 정리'에도 부합하는 듯한 면이 있지요. 하지만 이 '불완전성 정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수학적으로 참인 명제가 곧 객관적이라는 주장이란 점을 생각할 때, 이는 인간의 자유 의지 같은 수학적 진실이 아닌 주관적 요소의 의미를 영화처럼 강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약화시킨다고 볼 수 있겠죠.

여기까지 생각을 거듭했다면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 대한 비판의 재반박처럼, 공상과학(Science Fiction) 영화에 사용된 과학이 말그대로 공상(fiction)인데 그렇게 따지는 태도 자체가 영화 감상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재반박의 주장 또한 이유가 그리 타당하지 않아 보입니다. 일단 이 감독의 다른 영화들인 '인터스텔라(Intetstellar)'나 '인셉션(Inception)'부터 이번 '테넷(Tenet)'처럼 자신의 모순없는 세계관을 자랑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앞서 적었다시피 '테넷'은 한 편의 영화 자체를 논리적인 '회문'으로 만들기 위해 설계된 영화입니다. 다른 두 영화에서 공상 과학이 작중 인물들이 사용하는 수단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공상과학의 그 형식적인 논리 자체가 근본인 작품입니다. 따라서 영화 자체가 관객의 머릿속을 혼란시키면서까지 논리 회로를 짜놨다면, 관객 또한 영화와 평등한 지위에서 그 논리를 적용하여 모순점이나 그 타당성을 따져 볼 이유가 있습니다.

특히 이미 세상에 나온 다른 공상과학 영화들을 찾아보면, 이 영화처럼 외견상 복잡하게 무모순의 논리를 짜보지 않고도 상당한 고찰을 내보인 작품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런 작품을 제가 골라보자면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에일리언(Alien)' 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해당 영화는 합리적인 이유에 따른 원칙론자인 주인공 리플리(Ripley)가 마지막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고양이 찾으러 다시 되돌아갈 만큼 자신의 합리성을 관철하는 서사를 지녔습니다. 어떤 목표를 최대의 효율성으로 달성할 방법만을 고려한다는 그 합리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생존 본능에만 충실한 에일리언의 그 순수함을 찬양하는 안드로이드와 같은 논리를 낼 수 밖에 없단 위험을 잘 드러냈죠. 사람이 언젠가 안드로이드나 에일리언에 비해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역량이 부족하다면 논리상으론 그 인간은 폐기되어야 할텐데, 과연 미래에 그 시기가 오더라도 사람은 그 객관적이며 냉담한 합리성을 받아들일 수 있겠냐를 영화가 한편으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비단 영화 '에일리언(Alien)'이 선보인 미술과 음악 등의 기술적 성취만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근본적으로 좋은 문제 의식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부터 그 영화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정리하자면 결국 이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장점과 단점을 둘 다 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특히 그 단점이 더 부각될 여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물로 내건다는 영화의 소재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봐도 그렇고, 그보다 앞서 단순히 직중 인물의 감정선과 그에 따른 행동을 납득시킬 만한 연출을 보여줬냐의 측면부터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터미네이터 2(Terminator 2)' 같은 영화가 시간이동에 따른 모순을 물리학의 세계관 차원에서 그렇게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그 영화의 세계관이 이론상 참 부실했다고 기억하기 보단 터미네이터의 최후에 얽힌 인물들의 감정선을 더 기억하지 않습니까? 표면상 논리적인 기계 장치로서 이 작품이 지녔다는 그 예술성을 운운하기에 앞서서, 단순히 상업 영화의 차원에서도 이 영화는 어쩌면 진짜 '대(大)'여야 할 그런 사람 감정의 문제에 소홀했다고 생각하기에 아쉬움이 큽니다.